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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거나 말거나

양철호의 세계의 미스테리-시베리아 퉁구스 폭발의 진상은?

by 양철호 2011. 8. 23.




1908년 6월 30일, 시베리아 중앙의 작은 마을 니주네 카렐린스크의 사람들은 빛이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목격했고, 곧 이어 엄청난 폭발과 충격을 경험했다. 이 엄청난 재해는 역사가 기록된 이래로 가장 큰 충격이었다. 오늘날 ‘시베리아 대폭발’로 알려진 이 폭발의 원인이 된 물체가 만약 몇 시간 전이나 또는 몇 시간 후에 지상에 도달했더라면 인구 밀집지역을 직접 때려 몇 백만 명의 생명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사건을 목격한 니주네 카렐린스크 마을은 충격지점으로부터 32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다. 폭발 지점에서 13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기관사는 탈선을 우려해 기차를 세웠고, 이르쿠츠크 시의 지진계는 대지진의 진도를 기록했다.

 

시베리아의 삼림지대 퉁구스 지방을 덮친 이 폭발의 충격파는 지구를 두 바퀴 돌았으며, 당일 런던은 한밤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문의 작은 활자까지 읽을 수 있었다. 또한 스톡홀롬에서는 새벽 1시에 자연의 빛으로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그야말로 그 당시의 충격이 엄청났다는 것을 반증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퉁구스 지역 지도)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엄청난 폭발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하나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사는 시베리아의 작은 지역 신문에 실렸을 뿐이며 그것으로 끝이 났다. 어느 누구도 그 폭발의 원인이 무엇인지 조사하려하지 않았다. 이 폭발에 관해 가장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시기는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난 이후였다.

 

1921년 레닌(1870~1924)의 종합과학정책의 일환으로 소비에트의 과학아카데미는 이 폭발에 대해서 조사를 시작한다. 조사를 맡은 사람은 레오니드 크리크였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난 지 이미 10년이 지난 뒤였다.

 

크리크는 폭발 지점에 대한 확인 작업에 착수했다. 당시 그는 운석이 지상에 떨어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1927년 3월, 그는 사건을 목격한 현지 안내원과 함께 출발하여 4월에 현장에 드디어 도착한다. 그리고 그가 본 광경은 그야말로 참혹함 그 자체였다.

 

폭발이 일어난 곳에는 서 있는 나무가 한 그루도 없었다. 모두 한 쪽 방향으로 쓰러져 있었으며, 거의 20킬로미터나 뻗어 있었다. 드디어 크리크는 폭발의 중심을 찾을 수 있었다. 주위의 수목은 모두 방사형으로 타버렸지만 넘어지지 않고 꼿꼿이 서 있는 것도 있었다. 폭발의 규모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폭발의 중심지에서 마지막 폭발 경계선을 나타내는 곳까지 거의 60킬로미터에 달했다. 즉 폭발에 의해 약 1만 평방킬로미터의 삼림이 쓰러진 것이 된다. 그리고 폭발의 원인에는 거대 운석이라는 전제가 있다. 크리크는 주변에서 운석의 발견에 전력을 기울였다. 수많은 구멍들이 발견되었지만 거기에는 모두 물이 차 있었다. 물을 퍼내자 구멍은 텅 비어 있었다. 어떤 구멍의 바닥에는 나무의 그루터기가 있었다. 이것은 폭발로 인한 구멍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크리크는 네 차례나 이곳을 조사했으며, 죽는 순간까지 운석이 폭발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는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더군다나 운석이 떨어졌고, 이런 거대한 충격을 줬다면 실로 엄청난 운석 구덩이가 생겨야 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운석 구덩이는 찾을 수 없었다.

 

폭발의 수수께끼는 심각해졌다. 1983년 공중 조사가 행해졌다. 쓰러진 삼림의 면적은 2,000평방킬로미터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운석 구멍이 있어야 할 중심부에는 원래의 나무가 지금도 꼿꼿하게 서 있다는 것도 알았다. 운석이 아니라 폭탄의 폭발이 아닌가 하는 상상도 드는 상황이었다. 목격자들의 증언도 엇갈리기 시작했다. 700명 이상의 목격자가 물체가 낙하 할 때 진로를 변경했다고 증언했다. 하늘에서의 낙하 물체가 도중에 진로를 바꾼 전례는 없었다. 또 물리학적으로도 그 설명은 불가능하다.

 

이 폭발에는 또 하나의 기묘한 수수께끼가 있는데 그것은 주변의 나무나 곤충류에 대한 영향이다. 폭발에서 살아남은 수목은 성장이 정지되거나 또는 특별한 속도로 성장이 촉진되었으며, 폭발지에 특유한 신종 개미와 그 밖의 곤충의 출현이 그 후의 연구로 밝혀지게 되었다.

 

크리크가 사망한 후 통구스의 폭발과 이것보다 더 파멸적인 폭발 사이의 유사성에 대해 과학자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바로 핵폭발이다. 원자폭탄에 대한 지식으로 크리크가 고심했던 수수께끼의 대부분이 풀린다. 운석의 구멍이 없는 이유는 핵폭발로 설명이 가능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는 폭발 바로 밑의 건축물을 그대로 서 있었다. 폭발의 충격이 옆으로 퍼졌기 때문이다. 식물과 동물의 유전변이도 동일하다. 따라서 퉁구스 지방의 개와 순록에게서 볼 수 있었던 화상으로 부풀어 오른 물집은 방사능으로 인한 화상이라는 인식이 이제는 가능한 것이다. 또한 핵폭발은 지구의 자기장을 교란시킨다. 오늘날에도 퉁구스 폭발 근처 지역을 ‘자기 혼란’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원자폭탄’ 설의 결정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그 지역의 방사능에 대한 조사가 폭발이 있은 지 50년 이상이나 지난 뒤에 이루어졌으므로 그 시점에서는 이미 이상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UFO 광신론자들은 원자력 모터를 사용하는 우주선이 추락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과학자들은 이런 주장을 일축했다. 하지만 과학자들의 추리도 별반 다르지 않게 환상과 유사했다. 텍사스대학의 A.A. 잭슨과 M.P. 라이언은 초소형의 블랙홀로 인해서 폭발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증거는 없었다. 미국에서는 반물질이 폭발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었으나 역시 물증은 없었다.

 

근거는 아주 미약하지만 조금은 가능성이 있는 설로 영국의 프랭크 휘플의 혜성설이 있다. 혜성이 지구에 충돌했다는 설이다. 혜성설에 대한 반론은 혜성이라면 ‘핵'의 폭발을 수반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과 지구에 도달하기 훨씬 전에 천문학자들에 의하여 관측되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혜성이 태양의 방향에서 날아오면 그 발견은 지극히 어려우며, 또 혜성이 폭발하면 태양의 플레어의 폭발과 흡사한 방사능의 방출 현상도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비에트는 세계 120여 개의 천문관측소에 질문서를 보냈으나 퉁구스의 물체의 궤도에서 혜성을 감지했다는 보고는 전혀 없었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퉁구스의 폭발이 일어난 6월 30일은 베타 토리드라는 유성우의 궤도와 지구의 궤도가 교차하는 ‘유성 샤워’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유성의 하나가 유달리 커서 연소하면서 그 잔존 부분이 지구의 대기권을 통과, 그 초고온의 외부가 결빙한 내부에 반응했고, 열에 녹아서 액체가 된 유리를 얼어붙은 물에 갑자기 넣은 것과 같은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만약 이 설이 옳다면 크리크의 생각도 옳았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부분이 있다. 크리크는 자기의 설을 증명하는 증거를 단 하나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퉁구스 대폭발이 있은 지 80여년이 지났는데도 이 미스테리를 풀 수 있는 가능성은 더욱더 멀어져만 가고 있다.

 

과연 퉁구스에서 일어난 폭발의 진실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