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양철호
스토리 파고들기, 문학, 영화를 비롯한 온갖 미디어, 그리고 세상 사는 이야기까지 다양하고 재미있는 스토리들을 찾아 소개하고, 분석하고, 뜯어고치는 곳. 세상을 향해 일갈하기도 하고, 가슴 따뜻한 이야기와도 만날 수 있는 곳.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Notice

2011. 11. 2. 08:00 Story Doctor/history & myth

고려말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문익점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목화를 보고 종자에게 따라고 지시했다. 종자는 목화를 재배하는 노파의 제지를 뿌리치고 목화를 몇 송이 따는데 성공한다. 이 목화는 원래 원나라 밖으로 못나가게 하는 반출 금지 품목이었는데 문익점은 목숨을 걸고 붓뚜껍 아래에 목화씨를 숨겨와 고려로 돌아온다. 그리고 재배에 성공해 의복 생활에 혁명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문익점은 오랫동안 목화를 처음으로 들여왔으며 밀수에 성공한 최초의 밀수꾼으로 불리기도 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 이야기는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일까? 과연 문익점이 진짜 목숨을 걸고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숨겨가지고 들어온 것일까? 무엇이 진실일까?

문익점은 고려 충혜왕 1년(1331)에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다. 그는 공민왕 9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김해부사록 등의 벼슬을 지내고, 사간원 좌정언으로 있던 1363년에 계품사 이공수의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가면서 목화씨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 어느 기록에도 문익점이 목화씨를 몰래 들여왔다는 기록은 없다.

[고려사]의 문익점 열전에 의하면 문익점이 원나라에게 사신으로 갔다가 목화씨를 얻어와 재배했지만 재배 방법을 몰라 대부분 죽고 몇 그루만 살아남았다고 적고 있다.
[조선태조실록]의 문익점 졸기에 더 자세하게 나오는데 역시 몰래 들여왔다는 기록은 없고 그저 재배되던 목화에서 씨를 십여개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돌아왔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그럼 도대체 왜 문익점이 목화씨를 몰래 들여왔다는 이야기가 퍼지게 된 것일까? 문익점에 대한 이야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목화와 관련된 이야기 뿐이다. 즉 목화 하면 문익점이다. 이 이야기는 최근에 나온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이미 형성된 이야기였다. 즉 세월이 지나면서 문익점에게 목화의 사나이라는 인식과 더불어 어떠한 신화적인 이야기가 덧붙여져 만들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추측할 뿐이다.

그 근거로 사실 원나라에서 목화는 반출금지품목이 아니었다. 목화는 원나라 사방에서 재배되는 흔한 품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문익점과 목화와의 관계를 그렇게 설정한 것은 그 당시의 정치상황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즉 공민왕과 원나라는 불편한 관계였다. 공민왕의 개혁 정책에 원나라는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즉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원나라의 긴장 관계 사이에 문익점이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이 자연히 문익점에 대한 신화를 완성시키는 장치로 작용했을 수 있다.

또 하나는 문익점과 정천익의 후손들이 만들어낸 신화적 이야기가 아닐까 추측되기도 한다. 문익점은 정천익과 공동으로 면화 사업을 벌여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는 분명 의복에 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성공이었다. 이런 공으로 인해 신화적인 인물로 이야기가 덧붙여져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사실 문익점은 정치적으로는 참 운이 없는 인물에 속했다. 덕흥군 사건(원에서 선택한 고려의 임금으로 원의 군사력을 등에 업고 임금이 되기를 원했지만 고려의 이성계 등에 의해 패했다)때 휘말려 덕흥군에게 벼슬을 얻었다는 이유로 파면되었다가 목화 보급으로 공로를 이정받아 우왕 때 복직 되었고, 후에 또 사전(私田)개혁에 반대하는 보수파에 붙었다가 조준의 탄핵으로 파면당해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이런 정치적으로 언제나 최악의 선택만 했던 문익점이 목화 보급이라는 공로 하나는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공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한 인물을 참으로 다양하게 포장하기도 하고, 다양하게 궁지로 내몰기도 한다. 한 인물이 신화적 인물이 되는 데에는 어찌되었던 그가 세운 공이 절대적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역사만이 줄 수 있는 재미가 아닐까. 
posted by 양철호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최근 연구로 면화는 아주 예전에 한국에 들어왔다고 하더군요..
    왜 문익점의 이야기가 만들어졌는지..

    • 양철호 2011.11.02 21:43 신고  Addr Edit/Del

      고전판 신격화? 뭐 그런 건가? 어쨌든 목화에 있어서만큼은 조선시대에도 문익점이 인정받는 다는 거잖아요. 어쩌면 문익점이 대량생산에 성공한 인물이라서 그런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참 재미있는 사건들이잖아요.

2011. 10. 10. 10:57 Story Doctor/history & myth

잃어버린 왕국, 나주 반남고분의 주인은 누구인가

 

 

나주 영산강 유역의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반남면 일대에는 고분(古墳)들이 산재해 있다. 그 고분의 수는 약 30여기. 더군다나 그 규모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를 자랑한다. 일반인의 시각으로는 이 지역이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백제의 고분과 비교해 보기 쉽다. 그러나 백제의 고분에 비해서 상당히 거대한 이 반남 고분은 한국 고대사 최고의 수수께끼로 불리고 있다.



 

규모에 대한 예를 들어보자. 반남 고분 중 하나의 덕산리 3호 고분의 크기는 남북의 길이가 46미터이고 높이가 9미터에 달한다. 이 크기는 백제의 고분 보다는 엄청나게 커서 오히려 통일신라나 가야의 고분들과 비교가 될 정도다. 이 정도의 고분을 만들 정치세력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시기]에서 나주 반남 고분의 주인이 삼한시대 마한의 족장이 아닐까 추정한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사실 역사학계에서 바라보는 시각도 일반적으로 비슷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고 제대로 된 근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도대체 왜일까? 무슨 이유일까?

 

이 반남 고분의 매장법은 한반도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매장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의 봉토 내에 수 개 혹은 수십 개 이상의 시신을 담은 옹관이 합장되어 있는 것이며, 봉토 주위로 도랑이 존재했던 것도 특이하다. 옹관의 규모도 큰 것은 길이가 3미터에 무게가 0.5톤이나 나가는 것도 있다. 또한 금동으로 만든 호화로운 장식들도 존재했다.



 

이 고분에 처음 주목한 것은 일본이었다. 이유는 이 반남 고분이 일본의 고분들과 비슷한 모양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초로 조사한 기관은 조선총독부로 1917년에서 1918년 동안 대대적인 조사를 벌였다. 그러나 이들이 내 놓은 보고서는 이상하게 달랑 한 장짜리 보고서가 전부였다. 그리고 이 한 장짜리 보고서에 바로 임나일본부의 근간이 되는 왜인(倭人)의 매장 방식이나 유물과 유사하다는 내용이 포함된다. 그리고 추후에 자세한 보고서가 나오기로 되어 있었지만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이후 20여 년이 지난 후 1938년에 다시 발굴 조사에 들어간다. 그런데 실제로 제대로 된 조사는 이루어지지 못한다. 1차 조사 이후 보고를 통해 금동관이나 금동제 물품들이 발굴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도 제대로 된 조치를 하지 않아 대부분 도굴되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일본이 진정 반남 고분을 임나일본부의 근거로 사용하고자 했다면, 반남 고분의 매장 방식이나 유물이 일본의 것이라 주장하려 한다면 오히려 더 논리를 확대시키고 보호를 철저하게 했어야 했다. 그런데 일본은 너무나도 소홀하게 대해 심지어 도굴을 조장했다는 의심까지 사게 되었다. 이는 일본의 유물이 한국에서 발굴된 것이 아니라 반남 고분의 유물 주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지금의 일본을 세운 것이라는 결론에 부딪쳐 오히려 무시하고 도굴을 방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낳는다.

 

그럼 여기서 이야기 되는 왜는 과연 어디일까?

()나라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한전(韓傳) 보면 한과 왜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과 서는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은 왜와 접해있으며, 면적은 4000리가 된다.” 이 이후에도 여러 설명이 나오는데 동과 서의 바다를 경계로 둔다는 설명과는 달리 왜와 접해있다고 하는 남에 대해서는 바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즉 국경을 접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이를 통해 왜는 바다 건너 일본이 아니라 한반도에 있다는 설명이 된다. 그리고 비슷한 기록이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한조(韓條)에도 역시 등장한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백제본기 아신왕 6년에 왜와 국교를 맺고 태자 전지를 인질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모든 것이 왜를 일본에 있는 것으로 여기고 설명하면 이상했지만 한반도 내에 있는 정치세력으로 규정하면 설명이 쉬워진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한반도에는 과거 백제, 고구려, 신라, 가야 이외의 정치세력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기록은 여러 곳에 남아 있다. 그들이 3세기 경에 나주 반남 고분을 만든 장본인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고구려의 세력에 밀려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들은 일본에서 세력을 키워 실질적인 지배자가 된다. 이것이 바로 왜가 임나일본부를 주정하는 근거가 되나 사실 역설적으로 보면 오히려 왜가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 한본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된다는 점이다.

 

아직은 여러 가지 역사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들이 많다. 조작된 광개토대왕릉 비문도 그러하며, 심심치 않게 역사왜곡에 열중하는 일본의 문제도 풀어야 한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한반도에 존재했던 왜의 기록을 무시할 수는 없다. , 한반도에 존재했던 왜는 일본에서 건너온 세력이 아닌 일본을 세운 세력이라는 점을 우리는 추측해볼 수 있다. 바로 일본 문명의 기원이 바로 한반도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바로 나주 반남 고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posted by 양철호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일본에 갑자기 어떤 세력이 나타나서 일본의 세계관이 급변하죠.
    이 세력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세력이라는 주장이 꽤 있습니다.

    다만, 여러 기록을 살펴봤을 때, 임나일본부는 말도 안 되지만,
    일단 일본이 가야쪽에 일종의 거점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이 역시 부정할 수 없는 현재까지의 분석이지요. 앞으로 뒤엎어질 가능성도 있지만.

    광개토태왕비의 문구는 그저 백제를 까내리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본래 국가와 국가의 관계라는 게 항상 우위를 점할 수는 없는 거지요.
    백제는 고구려에게 박살이 난 뒤, 국가적 위상도 떨어지고, 어떻게든 다른
    나라의 군사까지 끌어들여, 고구려와 전쟁을 준비해야했기 때문에
    일본에게 외교적 우위를 빼앗깁니다만...

    광개토태왕 시기에는 오히려 백제가 일본보다 훨씬 외교적으로 우위에
    있었습니다. 칠지도가 그걸 명확하게 증명하고 있죠.

    광개토태왕비를 보면 백제를 '백잔'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악의가 보이는데,
    결국 백제를 까내리기 위한 문구라고 보면 될 것같습니다.

    • 양철호 2011.10.10 12:38 신고  Addr Edit/Del

      오옷.. 역사에도 해박하시군요. ^^ 그렴 역사에 대한 여러 수수께끼도 종종 올려야겠네요.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2011. 9. 16. 14:31 Story Doctor/history & myth



신화 중 전 세게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것은 아무래도 그리스로마 신화일 것이다.
장대한 스케일과 다양한 신들의 암투와 사랑, 그리고 그 스토리텔링은 어느 문학작품과 견주어보더라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하나의 작품이다.

영웅과 모험, 그리고 괴물과의 싸움 등 숱한 이야기를 남긴 그리스 로마 신화의 계보는 과연 어떻게 될까?
크로노스에서 시작되어 제우스를 필두로 신들의 세계, 올림포스의 12신들은 과연 누구누구인지 한 번 짚어보자.

신들의 이름은 우선 그리스식으로 하고 괄호 안에 로마식 이름을 표기한다.

1. 제우스(쥬피터)
제우스라는 이름은 고대 그리스어로 '밝은 하늘'을 뜻한다고 한다. 신들의 왕으로 번개를 소유하고 있다. 두 형제와 지배할 곳을 놓고 제비뽑기를 해 형인 포세이돈이 바다를, 또 다른 형인 하데스가 지하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

2. 헤라(주노)
제우스의 아내이자 제우스와 쌍둥이 남매이다. 헤라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보호자'를 뜻한다고 한다. 질투의 여신이어서 제우스와 관계된 숱한 여성들에게 저주를 내리는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그렇다고 제우스의 곁을 떠나지는 않는다. 포악한 성격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이름의 이유 때문인지 아이를 분만하는 어머니나 유모들의 보호자로 숭배받기도 한다.

3. 아프로디테(베누스, 비너스)
이름은 '거품에서 태어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바다의 물거품 속에서 알몸의 완전히 성숙한 모습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미와 성욕의 여신이며, 아들 에로스(큐피드)는 사랑의 신으로도 유명하다. 제우스는 아프로디테를 대장간의 절름발이 신 헤파이토스와 결혼시켰으나, 전쟁의 신 아레스(마르스)와 불륜을 가졌다고도 한다. 라틴어 이름인 베누스는 성병이라는 말의 어원이 된다.

4. 헤르메스(메르쿠리우스, 머큐리)
이름은 '거대한 기둥', 또는 '남근'을 뜻한다. 상업과 교역의 신이자 나그네, 도둑들의 수호신이며 신들의 사자이다. 날개가 달린 발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지며 능수능란한 협상가, 협잡꾼이기도 하다.

5. 아폴론(아폴로)
이름은 '미남 청년', 혹은 '파괴자'를 뜻한다. 태양 마차를 타고 하늘을 나는 태양신이며, 운동과 예술의 수호신이다. 그는 처음부터 태양신이 아니라 원래 태양신이었던 헬리오스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전한다.

6. 아르테미스(디아나)
아폴론의 쌍둥이 누이동생으로 달의 여신이자 어린아이와 사냥꾼의 수호신이며 영원한 처녀이다.

7. 아레스(마르스)
이름은 '전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항상 술에 취해 있고, 성미가 사납고 피에 목말라하는 전쟁의 신이다. 아레스는 제우스와 헤라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8. 헤스티아(베스타)
이름은 '가정'을 뜻한다. 가정의 수호신으로 아레스가 포악하다면 헤스티아는 관대하고 친절하다. 결코 분쟁을 일으키지 않으면 단란한 가정을 이루는 기술을 고안해냈다고 전해진다.

9. 포세이돈(넵투누스, 넵튠)
바다의 신으로 제우스, 하데스와 형제 사이이다.

10. 하데스(플루톤)
하데스는 '눈이 멀다'라는 뜻이다. 죽은자들의 주인인 지하 안식처의 신이다. 라틴어 이름은 플로톤은 '부유하다'라는 의미로 지하에 묻혀있는 광물이 모드 그의 것임을 반영하는 이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재물의 신이기도 하다.

11. 아테나(미네르바)
아테나는 태어난 것이 좀 다른데 제우스가 두통을 심하게 앓고 있을 때 그의 머리에서 완전히 성장해 갑옷을 입은 모습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아테네시의 수호신이며, 지혜의 여신, 플롯, 트럼펫, 쟁기, 고무레, 소멍애, 말굴레, 마차, 배를 발명했다고 한다. 또한 아테나는 정의의 여신이기도 하다. 아레스와 싸워 이긴 것은 아테나가 유일하다고 한다.

12. 헤파이토스(볼카누스)
제우스의 아들이자 아프로디테의 남편이다. 흉한 모습으로 묘사되는 대장간의 신이며, 대장장이의 수호신이다.


올림포스의 열 두 신들은 서로 뒤엉킨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신이라고 하기에는 오히려 인간을 닮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질투하고 복수하고 경계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히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의 모습에 더 매력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posted by 양철호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11. 9. 8. 15:51 Story Doctor/history & myth



제우스의 미움을 받아 코카서스 산 꼭대기에 묶여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먹히는 형벌을 받은 프로메테우스. 그는 헤라클레스에 의해 구해진다.
프로메테우스는 과연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제우스의 노여움을 산 것일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알려진 것. 이 이야기이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오래 전 시작되었던 신들의 전쟁에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제우스는 신들의 왕인 크로노스와 가이아의 아들이다.
먼 옛날 한 예언자는 크로노스의 아들 중 하나가 그를 죽이고 왕이 될 거라 예언하면서 크로노스는 자신의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모두 잡아 먹는다.
결국 가이아는 몰래 한 아이를 숨겨 살려두느데 그가 바로 제우스이다.

제우스는 후에 자신들의 형제, 그리고 신들과 힘을 합쳐 거인족인 크로노스와 전쟁을 벌인다. 바로 신들의 전쟁인 것이다. 크로노스는 거대한 타이탄족과 함께 제우스에 맞선다. 프로메테우스와 그의 동생인 에피메테우스는 신이 아닌 거인족이었다. 그런 그들은 크로노스가 아닌 제우스의 편에서 전쟁에 참여하게 되고, 결국 제우스가 승리하면서 그들도 신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프로메테우스라는 이름의 뜻은 시작을 여는 자, 미리 아는 자의 의미다. 에피메테우스는 끝을 닫는 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랫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어원이 된다. 프로메테우스는 이름의 뜻대로 미리 아는 자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제우스의 편을 든 것도 제우스가 승리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프로메테우스의 예언에 있었다. 그는 제우스도 언젠가 그의 아들 중 누군가에 의해 왕좌에서 밀려날 것이라고 에언했다. 제우스는 그게 누구인지 물었지만 프로메테우스는 답을 하지 않았고 이에 화가 난 제우스가 그를 코카서스 산 꼭대기에 묶어 벌을 받게 한 것이다. 즉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것과는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제우스는 그 이후에도 화가 덜 풀려 아름다운 여인을 만들어 프로메테우스의 동생인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낸다. 그 여인이 바로 판도라였다.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 형제는 인간을 위해 온갖 해로운 것들을 모두 상자에 가두어 두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상자를 열어버린 것이 판도라였던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이 벌을 받기 전에 동생에게 제우스가 보낸 여자를 조심하라고 일렀지만 에피메테우스는 그만 판도라의 미모에 빠져 소홀히 앴고 그 덕에 상자가 열리며 온갖 나쁜 것들이 인간 세상으로 다시 흘러나온 셈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어딘가 불완전하고, 인간의 모습을 닮았다. 위대하고 거대하며 전지전능하지만 사람의 감정을 닮은 신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재미있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posted by 양철호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11. 9. 8. 15:50 Story Doctor/history & myth



단군신화는 우리나라의 어느 누구나 아는 대표 신화의 하나이다.
단군신화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환인의 명령으로 환웅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목적(홍익인간)으로 3천명과 풍백, 우사, 운사를 거르니로 태백산에 내려온다. 그리고 신시(神市)를 열어 인간을 다스린다. 그때 호랑이와 곰이 황운을 찾아와 사람이 되기를 청하니 환웅은 그 둘에게 쑥과 마늘을 주고 굴에 들어가 그것만 먹으며 100일동안 참으면 사람이 된다고 하였다.

호랑이와 곰은 동굴로 들어가 쑥과 마늘만을 먹으며 지내다가 결국 호랑이가 참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를 하게 되고, 곰은 끝까지 버텨 삼칠일(21일)만에 여자가 되었고, 환웅은 이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다. 바로 이 아이가 단군이다. 단군은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우니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였다.

이것이 바로 단군신화이며, 고조선의 건국신화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특징으로 단군신화에는 곰에 대한 토템사상이 담겨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주장에 대해 이어령은 단호하게 아니라도 말한다.
단군신화에서의 곰은 토템과는 별개의 의미라는 점이다. 즉 그 당시에 사람들은 곰을 잠아 먹기도 했다. 호랑이와 곰에 대한 토템사상을 가진 종족과의 경쟁에서 곰 토템이 이겼다면 곰에 대한 숭배가 더 주도적이어야 했지만 그런 기록은 없다.
오히려 호랑이는 그 이후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더 신성시되어 등장하지만 곰은 웅녀를 제외하곤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결국 이는 토템상상과는 별개로 봐야 한다는 것이 이어령의 주장이다. 어찌 민족에 대한, 국가에 대한 정체성을 호전성이냐 참을성이냐 둘 중 하나로 결정하는 매개체로 동물을 빗대었을 수도 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존재한다.
고조선이 건국되었던 시기는 역사적으로 기원전 2333년으로 알려져 있다. 즉 이 숫자와 지금의 서기 숫자를 합하여 단기를 기록하기도 한다.
그리고 고조선이 건걱되었던 시기는 청동기 시대였다. 청동기와 철기를 나누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단지 사용되는 금속의 차이가 아니라 본격적인 농경의 시작이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즉, 철기 문화는 본격적인 농경사회를 나타낸다.
철기문화는 중국대륙의 위만이 고조선을 지배하면서 생긴 위만조선에 의해 전파되었다고 하는 것이 역사의 정설이다. 즉 위만 조선 이후부터 본격적인 농경사회가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신화를 다시 한 번 보자.
환웅이 데리고 내려온 풍백, 우사, 운사는 바로 바람, 비, 구름을 말한다. 이 세가지는 농경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인식되어진다. 이 농경의 세 가지 요소를 함께 가지고 내려왔다는 단군신화의 이야기는 본격적인 농경사회를 암시하는 내용이다.

철기 문화가 전해지기 훨씬 이전의 본격적인 농경 사회의 암시를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까? 진정 철기 문화가 위만조선에 의해 전해진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사대주의 역사가들에 의해 포장된 것일까?

역사학자들이 무시하는 한단고기라는 재야 역사서(재야 역사서라는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다)에 보면 단군이 한 개인이 아니라 국왕의 호칭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사실 삼국유사나 다른 역사서의 단군신화의 단군은 수천년을 살았다는 말도 안 되는 기록이 실려있다. 오히려 한단고기의 주장이 더 그럴듯한 이유이다.

이제 신화가 아닌 실제 역사일 것이라고 믿어지는 단군신화의 내용과 철기 문화의 전래, 그리고 본격적인 농경 사회의 시작이 가져오는 불일치한 역사적 미스테리를 본격적으로 파헤쳐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럴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posted by 양철호

댓글을 달아 주세요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