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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거나 말거나

양철호의 세계의 미스테리-파라오의 저주

by 양철호 2011. 7. 11.

1922 11 26, 크리스마스를 하루 지난 날, 영국의 고고학자인 하워드 카터에 의해 고고학적으로 가장 큰 발견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이집트의 왕 투탕카맨의 무덤이 발굴된 날이다. 이 날은 역사적인 날임과 동시에 불길한 사건의 시작된 날로 기억되고 있다. 더군다나 그 불길한 기운은 바로 파라오의 저주라고 일컬어지고 있으며 아직까지 수수께기로 남아 있다.


                                                    (투탕카맨의 황금 마스크)

 

1923 4월 발굴에 참여했던 카너번 경의 죽음을 시작으로 1929년까지 관여했던 22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야말로 파라오의 저주였다. 발굴을 한 지 불과 6년 만에 관련된 사람들이 이토록 목숨을 잃는 다는 것을 그저 우연의 일치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아직까지 논란이 분분한 이유이다.

 

투탕카맨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은 뒤로 하고, 의문의 죽음에 대해서 되짚어보자. 첫 죽음은 조금 전에 언급했던 카너번 경이었다. 그는 1923 4월 갑작스러운 고열을 앓았다. 열은 40도까지 치솟았고 12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가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카너번 경 이후로 줄줄이 죽음이 이어진다. 역시 발굴에 참여했던 미국의 고고학자 아서 메이스는 카너번 경 사망 직후 몸이 이상하다고 호소하다가 결국 혼수상태에 빠져 사망하고 만다. 미국의 민간금융업자 조지 굴드는 카너번 경의 사망소식을 듣고 카이로에 왔다가 무덤을 방문하고는 역시 이튿날 고열로 사망하고 만다.

 

영국의 실업자 조엘 울은 무덤을 견학하고 귀국하던 도중 높은 열로 사망했고, 투탕카맨의 X레이를 촬영했던 사진기사 아치볼드 더글라스 라이드는 1924년 영국으로 돌아가서 사망했다.

발굴 책임자인 카터의 부인도 벌레에 물려 사망했으며, 카터의 비서는 침대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투탕카맨의 미이라를 검사한 두 명의 의사 중 한 명인 더글라스 테리 교수는 1925년에 사망, 도 한 사람의 의사인 알프레드 루카스도 거의 같은 시기에 심장 발작으로 급사했다.

 

이에 대한 견해로 신비주의로 해석하고자 하는 열망들이 그 시대에는 앞서 있었다. 각종 언론에 기고가 넘쳐났고, 대부분은 파라오가 자신의 무덤을 건드리는 사람들을 저주해 죽인다는 점이었다. 문제는 이런 주장에 반박을 할만한 근거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발굴에 참여한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죽음은 분명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오래된 무덤 안의 오염된 공기에 감염되어 사망했다는 설이 탄력을 받기도 했지만 공통적으로 나타난 고열이 말라리아와 비슷하다는 점과, 몇몇 사람들은 전혀 다른 원인으로 사망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잃었다.

그렇다면 과연 진정으로 파라오의 저주일까? 이 주장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는 발굴 당시 근처에서 찾아낸 점토판에 있었다.

점토판에 적힌 상형문자를 해독한 결과 그 글귀는 죽음은 그 날개로 파라오의 영안을 교란시키는 자를 모두 죽이리라.’고 적혀 있었다. 결국 저주에 대한 논란이 일파만파로 커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샹폴리옹의 발견으로 유명한 로제타석)

 

그러나 이를 우연의 일치로만 보는 경우도 많다. 발굴에 참여한 사람들은 사실 수백 명이 넘었다. 그 중 22명의 사망만을 가지고 저주라고 운운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 22명이라는 숫자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만큼 예외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영화화 되는 파라오와 미이라에 대한 가십들을 보면, 아직 파라오의 저주에 대한 논란은 시원한 해명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과거의 어떠한 정체 모를 오염 물질이든, 과거 망령의 저주이든 말이다. 그래서 더더욱 죽은 자의 무덤을 건드리는 것에는 꺼려지는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