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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거나 말거나

양철호의 세계의 미스테리-KAL858기와 김현희

by 양철호 2011. 7. 2.

KAL858기 폭파사건의 미스터리

 

몇 해 전 검찰에서는 최종적으로 KAL858기의 폭파는 북한공작원 마유미(김현희)의 범행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즉각 변호인단과 희생자 유족회는 검찰의 수사기록을 공개하라고 촉구했지만 검찰은 수사기록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어째서일까? 그리고 왜 재수사를 요구하고 의문점들을 추궁하는 것일까?

 

(마유미(김현희)의 기자화면 모습)

 

사건을 되짚어보자. KAL기가 실종된 것은 1987년 11 29. 이날은 13대 대통령 선거의 한판 승부를 앞두고 있는 김대중 후보의 선거유세 날이었다.

승객 95명과 승무원 20명 등 115명을 태우고 이라크의 바그다드 공항을 출발,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기는 버마(미얀마)의 영해인 벵골만 상공에서 11 29일 하오 2시 마지막 교신을 끝으로 실종되었다. 사고기의 탑승객들은 대부분이 중동 건설현장에서 귀국하던 노동자들이었다. 실종된 KAL 858기는 71년 미 보잉사로부터 도입한 것으로, 사고 두 달 전인 87 9월에도 동체착륙을 한 낡은 비행기였다.

당시 안기부의 수사발표에 의하면 KAL기 폭파범인 마유미(김현희)와 신이치(김승일)는 이라크 바그다드 공항에서 콤포지션C4 폭약 3 50g을 장약한 시한폭탄 라디오와 액체폭약 7cc를 술병에 담아 비행기에 탑승, 기내에 장치하고 아부다비 공항에 내렸다.

 

(피해 기종과 같은 비행기의 좌석 배치와 폭탄 설치 위치)

 

사건은 명확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수많은 의문점들이 남아 있다. 이제 그 의문점들을 하나하나 짚어보자.

 

하나, 바그다드에서 폭탄을 가진 채 비행기에 탑승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 당시 이란과 이라크는 전쟁중이었으, 각종 테러에 민감한 때라 검열이 상당히 심했다. 그런데도 김현희는 별다른 제재 없이 공항을 통과했다. 폭파용 배터리를 빼앗겼을 때에도 항의하자 손쉽게 돌려받았다고 한다. 이 주장에 대해 그 당시 이라크 당국은 절대 그럴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물론 이 사실은 국내 언론에 알려지지 않았다.

 

, 아부다비에서 비행기에 폭탄을 장착하고 내린 마유미와 신이치, 별다르게 장착한 것이 아니라 짐칸에 폭탄이 든 가방을 두고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승무원들은 승객들이 두고 내린 짐을 그대로 두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이 원칙이 여기서 깨졌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환승객의 짐은 오히려 더 철저하게 검사를 한다. 테러의 위험이 늘 산재하기 때문이다.

 

, 아부다비에서 마유미와 같이 비행기를 내린 11명의 국적과 이름, 직업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있다. 외국 언론에서 이들이 한국의 고위 관리라는 보도를 한 적이 있어 더욱 의문점이 거세지고 있다. 이들은 어째서 중간에 내렸고, 도대체 누구일까? 명단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공개되지 않고 잇는 것일까.

 

, 마유미와 신이치의 여권이 너무 조잡하게 위조가 되어 있어 손쉽게 그들을 잡을 수 있었다. 문제는 미국의 달러를 국가차원에서 위조하는 기술력까지 갖춘 북한 정부가 여권 위조를 조잡하게 했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 그리고 그런 조잡한 여권을 가지고 이제껏 여행을 해왔다는 것도 의문이다.  

 

다섯, 바레인에서 붙잡힌 마유미와 신이치는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신이치는 그자리에서 즉사, 마유미는 병원으로 이송되어 살아난다. 그런데 바레인 병원의 담당 의사는 마유미에게서 아무런 음독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검사에서 어떠한 독극물도 검출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마치 독을 마신 것처럼 위장을 한 것일까? 이를 후일에 마유미는 하느님의 기적으로 돌리는 신앙간증을 하고 다니기도 한다.

 

여섯, 모든 행적이 대통령선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기체가 실종된 것은 여의도에서 김대중 당시 후보의 유세가 있던 날, 마유미가 한국으로 송환된 날은 대통령 선거 바로 전 날이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과거에도 이런 사건들과 정치를 연관시키는 일은 허다했다. 결국 선거는 신문의 1면에서 밀리게 되고 국민의 관심은 온통 마유미에게 쏠리게 된다.

 

일곱, 마유미의 진술서의 표기가 일치하지 않는다. 그는 철저하게 대남 공작을 받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남한의 문체를 사용하던가, 아니면 모든 것이 밝혀진 이후이기 때문에 북한의 문체를 사용하던가 해야 했다. 그러나 그 둘을 어정쩡하게 섞어 사용했기 때문에 언론에서 보도하면서 오히려 당시 안기부가 내용을 고치는 헤프닝까지 벌어졌다. 예를 들어 그 당시 규율은 북에서 규률로 표기했다. 그런데 마유미는 규율로 표기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당시 남한에서 읍니다로 표기하던 것은 끝까지 북한식 표기인 습니다로 표기했다. 혼선이 빚어진 것이다. 그밖에 자술서에서 남한식으로 표기된 단어를 북한식과 비교해보면, 주 모스크바 소련대사관(소련 주재 대사관), 힐터부분(려과부분), 쇼핑(물건사기), 조선항공기(조선민항), 녀안내원(녀성 접대원) 등과 같다.

 

여덟, 마유미가 주장한 폭발물의 양으로는 거대한 항공기가 공중분해 되지 않는다는 전문가의 주장이 나왔다. 일본의 군사전문가 오기와 가주히사씨의 견해에 따르면 마유미가 장치한 폭발물로는 “좌석 위의 듀랄루민 판에 직경 1~2m의 구멍이 뚫릴 정도”라고 한다. 그는 이같은 기체 손상에도 1m 이상의 고도를 비행하는 여객기가 기압에 의해 공중분해 됐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5분 이상의 여유는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5분이면 충분히 고도를 낮춰 기압을 안정시키거나 통신을 통해 기체의 이상을 알릴 시간적인 여유는 있었다.

 

아홉, 사망한 신이치가 소지한 필름에서는 비엔나 시내나 베오그라드 공원에서 관광하며 여유 있게 찍은 사진이 현상되었다. 머리카락 하나 남기지 말아야 할 특수공작원이 사진촬영을 할 만큼 보안의식이 허술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김현희는 “부녀관광객으로 위장하기 위해서였다”고 해명했다.

 

, 1989, 북한을 방문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조사를 받던 임수경의 머리 속에 남아 있는 마유미는 언론에서 비친 모습과는 상당히 달랐다고 전한다. 안기부 지하밀실에서 만난 마유미는 사형선고를 언도 받은 후에도 안기부 밀실까지 찾아와 “차를 끓여줄 테니 놀러 오라”는 말까지 유유히 내뱉어 몹시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그리고 김현희는 수다스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말을 많이 하고 활달한 성격이었다 한다. 임씨는 줄곧 얘기를 듣다가 “서울에서 2년 넘게 살아서인지 서울 말씨를 배운 것 같다”고 하자 김현희는 그 후부터 어색할 정도로 평양사투리를 섞어 썼다고 한다.

 

(희생자 합동 위령제)

 

이 외에도 수많은 의문들이 아직 풀리지 않은 채 유가족들의 진상규명 요구는 계속되고 있다. 이후 마유미는 자신을 취조했던 안기부 직원과 결혼해 일본에 거주하며 언론에 노출을 꺼리며 생활하고 있다. 간혹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어 북한의 만행에 대해서 강조하기도 하고,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기도 한다.

도대체 그녀의 정체는 무엇일까? 무엇이 진실일까? 왜 이 사건에서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사건이 그림자처럼 겹쳐지는 것일까? 그나마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의 수사 기록은 100년 후에 공개한다는 원칙이라도 있다. 그러나 LAk858기 폭파의 진실은 여전히 어둠에 묻힌 채 의문만을 잔뜩 쌓아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