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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거나 말거나

양철호의 세계의 미스테리-세익스피어는 실존했는가?

by 양철호 2011. 9. 22.

                                                   (윌리엄 세익스피어)

1770년 제임스 월모트라는 목사는 두 명의 극작가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바로 프랜시스 베이컨과 윌리엄 셰익스피어였다. 그는 세익스피어의 고향에서 그에 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세익스피어의 고향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해서 알고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익스피어의 희곡을 연구한 결과 월모트는 셰익스피어가 광범위한 학문을 터득한 극작가이며 상당한 규모의 책들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확신하게 된다. 그러나 정작 월모트는 셰익스피어가 소유했다고 생각되는 책을 단 한권도 확인할 수 가 없었다. 월모트는 이 결과로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한다. 그 결론은 다름 아닌 세익스피어라는 이름의 인물은 그 사람이 썼다고 전해지고 있는 희곡의 저자가 아니며, 이것을 쓸 수 있는 모든 자격을 갖춘 인물은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결론이었다. 이것이 바로 세익스피어의 정체에 대한 의문의 시작이다.

 

그 무렵 셰익스피어는 이미 영국이 낳은 최대의 극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월모트는 자신이 조사해서 내린 결론을 입밖에 내지 않고 있다가 1803년에 자기를 찾아온 입스위치의 한 퀘이커 교도에게 이 기괴한 비밀을 털어놓는다. 제임스 카우웰이라는 이 퀘이커 교도는 셰익스피어의 생애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 지방의 문예그룹의 부탁을 받아 셰익스피어를 신뢰할 만한 전기가 없어서 월모트에게 이야기를 들으러 왔던 것이다. 그리고 2년 후, 카우웰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세익스피어의 설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청중들은 충격에 빠졌지만 카우웰의 강연은 소도시에 한정된 하나의 작은 파문으로 사라지는 듯싶었다.

 

그로부터 1세기가 지나 저명한 셰익스피어 학자인 알라다이스 니콜 교수는 『타임 문예』에 월모트를 ‘최초의 베이컨 설 창시자’로 소개했다. 그러나 그는 윌모트의 주장은 믿음직스럽지 못한 가설이라 하여 배척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기괴한 설이 난무하는 것인가?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세익스피어가 『햄릿』이며 『리어왕』을 썼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의문이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의문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제부터 그 근거를 하나씩 짚어보자.

 

셰익스피어에 관하여 가장 곤란한 것은 고향으로 돌아와 사망한 세익스피어와 희곡의 저자라고 하는 사실을 연결시킬 수 없다는 점이다. 극작가로 성공한 세익스피어는 고향으로 자신의 작품이 인쇄된 책을 한 권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당시의 인쇄판은 지금도 꽤 많이 소재가 알려져 있어 희귀하지도 않은 때였다. 도대체 그가 소장했다고 여겨지는 책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몇몇 학자는 그 당시 연극에 대한 직업적 가치관이 적용된 것이라고 해석한다. 즉 연극은 그당시 그리 대접받는 훌륭한 직업이 아니라 포주와 비슷한 취급을 받았기에 세익스피어 스스로 자신의 경력이나 작품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물론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학가는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역시 다른 어느 직업보다도 한 단계 위로 생각되고 있다. 더욱이 월모트는 세익스피어가 쓴 희곡에서 방대한 양의 학문적 성취와 경험을 느낄 수 있었다. 세익스피어는 영국 시골 스트랫퍼드의 도살업자 아들로 태어났다. 그런 그가 궁정 사회는 물론 의학, 법률, 박물학, 외국의 사정 등 폭넓은 지식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지식을 몸에 익힐 수 있었는가? 이에 비하면 프랜시스 베이컨은 철학자로 수필가며 왕조의 대법관으로 당시의 가장 박식한 인텔리의 한 사람이다.


                                                       (프랜시스 베이컨)

 

1867년 베이컨과 셰익스피어를 결부시키는 아주 흥미 있고 또 설득력도 있는 물건이 발견되었다. 베이컨의 소유로 여겨지는 고문서로, 적혀있는 내용의 대부분은 베이컨의 작품 메모였다. 문제는 커버로 맨 위쪽에 ‘Mr ffrauncis Bacon’이라고 씌어 있었으며 마찬가지로 위쪽에 ‘Nevill’이라는 것이 두 번 씌어 있었다. 그리고 조금 아래에 ‘Ne vele velis’(“내가 원하는 것을 갖고 싶어 하지 말라.”는 뜻의 라틴어)라는 글자가 있었다. 이것은 베이컨의 조카 헨리 네빌경의 가문 문장에 들어가는 명문이었다. 이손으로 쓴 종잇조각에는 두 종류의 필적이 있었는데 필기한 자의 필적인 듯했다. 베이컨이 고용한 서기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커버의 종잇조각에는 차례 같은 리스트가 보였는데 문서에 실제로 들어 있는 서류의 항목이름이라고 생각되었다. 예컨대 베이컨 자신이 쓴 네 개의 수필 제목이 그것이었다. ‘Philip against monsieur’(필립이 므슈에 반대)라고 읽을 수 있는 것은 여왕과 프랑스의 앙주 공의 결혼에 반대하는 필립 시드니 경으로부터의 의견 상주문, ‘Speeches for Lord Essex at the tylt’(마상 시합대회에서의 에섹스 경의 연설)이라고 읽을 수 있는 것은 베이컨이 쓴 에섹스 백작을 위한 연설 초안, ‘Loycester's Common Wealth’(레스터주)라 읽을 수 있는 것으로 레스터주에 관한 보고서이다. 한 편 이 커버의 종잇조각에는 문서에는 실제로는 들어 있지 않은 항목도 작성되어 있었는데 토머스 내시의 상연 금지극 『개들의 섬』, 『리처드 2세』, 『리처드 3세』등이다. 이 두 셰익스피어극의 타이틀 바로 위에는 ‘By ffrauncis William Shakespeare’ (프랜시스 윌리엄 셰익스피어작)라는 글자가 보였다.

그러나 이 종이 조각은 그리 대단한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님이 차차 밝혀지게 되었다. 『리처드 2세』와 『리처드 3세』는 ‘문제극’으로 당시의 정치 상황과 미묘하게 통하는 이야기였다. 이것이 ‘문제극’의 리스트에 오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여왕의 비밀 고문관으로서 또 법률 조언자로서 이러한 ‘아슬아슬한’ 작품을 조사하는 것이 베이컨의 직무였다.

 

이상의 사실에서 다음과 같은 추측이 가능해진다. 이 문서에는 베이컨의 의견을 요구했던 몇몇 ‘발표금지’의 작품이 들어 있었다. 커버의 종잇조각을 자세히 보면 ‘Mr ffrauncis Bacon’과 ‘Mr ffr-auncis’ 라는 이름이 자주 나오는데 낙서를 한 느낌이었다. 아마도 베이컨 자신의 필적인 듯하다. 셰익스피어의 이름도 계속 나온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보면 ‘Mr ffrauncis William Shakespeare’라고 계속해서 읽는 것은 타당하지 않음이 명확해진다. ‘ffrauncis’와 ‘William Shakespeare’는 분명히 높이의 위치가 다르다. ‘Mr ffrauncis’의 바로 아래에 ‘Bacon’이라는 성의 글자가 보인다. ‘William Shakespeare’라는 글자는 그의 두 편이 희곡 타이틀 바로 위에 있었다. 베이컨이 아니라 희곡에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베이컨 설의 신봉자들에게는 유감스러운 결론이 되지 않은 수 없다. 이 문서는 일반적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보다 베이컨과 셰익스피어를 굳게 연결시키는 증명이 되지 못한다. 그저 베이컨이 여왕의 비밀 고문관으로서의 의무로 그 직무 수행의 과정에서 『리처드 2세』와『리처드 3세』를 훑어보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베이컨 설이 성립되기 어려운 이유로 그의 성격을 들 수 있다. 두 사람의 성격은 전혀 다르다. 『한여름 밤의 꿈』과 『12야』의 작가는 틀림없이 마음씨가 고운 선량한 사람이다. 주위의 친구들이 ‘온화한 셰익스피어’라고 말하는 것도 수긍이 간다. 그러나 베이컨을 ‘온화하다’고 평한 예는 거의 없다. 그는 당대 제일의 학식을 가졌으면서도 항상 자기 자신과 자신의 운명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야심은 언제나 가장 현실적인 대상을 지향했는데 그것은 권력이었다. “정치 권력 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것이다. 남에 대한 권력,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권력이다.” 그는 무정할 정도로 계산적인 사람이었다. 인간의 성공 비결은 남의 약점을 이용하여 주위를 ‘조정’하는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는 사람이었다.

 

베이컨의 성격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이 있었는데 위대함과 소심함의 이해를 초월한 뒤범벅이었다. 그 시대의 최고 지식인임과 동시에 어느 면에서는 낙인찍힌 비열한 인간이었다. 베이컨이 셰익스피어극을 쓸 수 없다는 것은 쇼펜하우어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베이컨도 사실은 많은 ‘후보자’ 중의 최초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 1891년 제임스 그린스트리트라는 고문서 연구가가 잡지 『지니얼로지스트』에 연재물을 집필하여 셰익스피어를 더비 백작 윌리엄 스탠리와 비교하고 있다. 로버트 프레이저라는 미국인의 저서 『침묵의 셰익스피어』에서도 거론된다. 아벨 레프란스 교수도 이 설의 신봉자로 4권의 저서를 냈는데 그 목적은 셰익스피어가 프랑스의 가정과 프랑스 사람에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명이었다. 또 그 교수는 『자에는 자로』의 줄거리는 파리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소재로 했으며 인물의 이름도 셰익스피어의 등장인물과 거의 같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 한 사람의 유력한 후보자로 크리스토퍼 말로가 있다. 이것을 최초에 주장한 것은 샌프란시스코의 윌리엄 G.지글러라는 법률가로 그는 1895년에 『그것은 말로였다』라는 저서를 낸다. 이것은 세상의 주목을 끌지는 못했지만 1955년에 미국의 학자 켈빈 호프만의 저서 『셰익스피어 살인사건』에서 다시 부활한다. 말로는 1587년, 23세의 젊은 나이에 최초의 희곡 『탐벌레인』을 서서 명성을 얻었다. 또 셰익스피어작으로 전해지는 『헨리 6세』는 말로와의 합작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되고 있다.

 

1914년경 존 토머스로니 라는 초등학교의 교장이 세익스피어는 희곡을 썼을 리가 없다고 확신하게 되어 자격을 소유한 엘리자베스조 시대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작품분석으로 저자의 성격을 미루어 짐작하고 우선은 기본 요건을 충족시키는 한 사람을 지명하기에 이르렀는데, 그의 이름은 에드워드 드 베레로 제 17대 옥스퍼드 백작이다. 그의 저서 『셰익스피어의 신원 조사』는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것과 같은 수필이다. 많은 사람이 절찬하지만 ‘불리한 이름’ 때문에 널리 독자의 공감을 얻지는 못했다.

 

셰익스피어의 신원 문제에 몰두한 연구자는 이 밖에도 말로 설의 S.E. 실리만과 다니엘 디포 설의 조지 배티가 있다. 로니의 책은 잊혀 졌지만, 그 설은 1984년에 미국의 학자 찰턴 오그번에 의해 다시 빛을 보게 된다. 오그번의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미스테리』는 두꺼운 저서인데 독자를 매혹시키며 또한 싫증이 나지 않는 내용이다. 옥스퍼드 백작이 ‘Hark, hark the lark’와 ‘Full fathom five’를 쓸 수 있었던 시정시인이라는 증명으로서는 저자 오그번이 상당한 설득력을 보이지만 『겨울 이야기』,『리어왕』,『눈보라』등 후기의 희곡에 대하여는 그것이 옥스퍼드 백작이 사망한 1604년보다 전에 쓰여진 것을 독자에게 납득시킬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로니는 이 어려운 일을 다른 인물을 저자로 정하는 것으로 해결한다. 『눈보라』읭 저자는 월터 폴리 경, 『헨리 8세』의 저자는 존 플레처라는 식이다. 한편 오그번은 이런 작품들은 모두 추정 연도보다 이전에 씌어졌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로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단정에 납득할 독자가 많다고는 생각하지 어렵다.

 

대부분의 ‘셰익스피어 대인설’에 공통된 약점은 문제를 너무 면밀하게 조사하는 바람에 나무는 보여도 숲 전체는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좋은 시와 나쁜 시의 구별조차 못할 정도로 문학의 본질에 관하여는 읽는 힘이 부족하다. 저서의 몇 페이지에서는 대단한 설득력을 보이지만 책 전체의 설득력은 형편없다.


(세익스피어 생가)

남는 것은 여전히 세익스피어이다. 하지만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더라도 다음의 의문점은 여전히 남는다. 아버지가 까막눈이었고 자식도 까막눈이었던 사나이, 자기가 쓴 책을 단 한 권도 자기 집에 소장할 생각조차 안했던 사나이, 그런 사나이가 『햄릿』과『오델로』의 저자일까? 다른 모든 후보에 대하여는 기설이라 하여 물리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우리는 그 제임스 월모트 목사가 생각하고 있던 명제와 같은 문제에는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그 희곡과 소네트를 누군가가 쓴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은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