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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막힌 세상 이야기

KINO(양철호)의 이슈 파고들기-진정으로 아름다운 사람, 김미화

by 양철호 2012. 2. 14.

김미화, 900대 1 뚫고 경리직 합격 이유가...

대한민국 대표선배가 88만원세대에게 코미디언 김미화 


내 묘비명은 '웃기고 자빠졌네' 김미화씨는 수도가 얼어서 세수도, 화장도 못하고 나왔다며 미안해했다. 그러면서도 기죽지 않고 인터뷰에서 할 말 다했고 당당하게 카메라 앞에도 섰다. '김미화'는 힘들고 어려워도 기죽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사진=임성균 기자 tjdrbs23@

"그때 나를 (입양) 보냈어야 오프라 윈프리가 되는 건데. 하하"
코미디언 김미화(48)는 슬픈 이야기도 참 슬프지 않게 이야기하는 재주가 있는 듯했다. 돌아서 생각하면 진짜 아픈 이야기인데도 말이다. 어떻게 저런 슬픈 인생 스토리에서 저런 성격이 나와 코미디언이 될 수 있었을까 싶었다.

아버지는 폐병으로 누워있고 어머니는 보따리장수를 하던 김미화의 어린 시절, 주인집 할머니는 입양을 보내라고 권했다. "우리 집으로 찾아온 미군들 팔뚝의 노란 털이 아직도 기억에 남죠. 엄마가 차마 못 보내더라고요. 그때 나를 보냈어야 하는데. 하하하."

일자눈썹을 붙이고 한 손에는 몽둥이를 들고, 콤비 김한국을 제압하고는 "음메 기살어"하던 순악질 여사의 모습은 그대로 김미화의 모습 같았다. "제가 공부를 못했잖아요. 그래도 방송에서 자기 할 일 하잖아요. 그러니 젊은 친구들도 기죽지 말라는 겁니다." 지난 7일 서울 목동 CBS 편성국에서 만난 김미화는 집 수도가 얼어서, 세수도 화장도 못한 얼굴이라고 했지만 기죽지 않고 인터뷰에 응했다. "기만 안 죽으면, 바닥을 치고 올라오지 못할 게 없거든요."


"지금도 우리엄마는 잔치국수를 안 먹는다"
김미화는 대부분 동네 사람들이 광주리 이고서 시장에서 물건을 팔며 살아가던 수유리 무허가 촌에서 자랐다. 하지만 그는 "주어진 환경에서 얼마나 재미있게 살았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땐 국수를 정말 많이 먹었는데, 엄마가 장사 나가면서 국수를 한 솥씩 끓여놓고 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국수가락이 묵이 되죠. 그러면 그릇으로 떠서 묵을 하나씩 뽑아먹는 거예요. 집에 보리쌀 같은 거라도 있으면 냄비에 볶아먹다가 다 태워 엿장수한테 갖다 주기도 하고, 전선 같은 거 주워다가 고물상에 갖다 주고 알사탕 사먹기도 했죠, 동네에 넝마주이도 많았는데, 인형 망가진 거 주워다 놀기도 했고, 동네 어른들 앞에서 가수 흉내 내고 용돈 벌기도 했어요. 가난했던 건 맞는데, 가난하다고 느껴본 적은 없어요. 그냥 즐겼던 것 같아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들은 대개 성격도 독하기 마련인데, 김미화는 "가난했기 때문에 성격이 더 좋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아홉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한 친구가 '아빠도 없는 게 까불고 있어' 그러더라고요. 화가 나서 따귀를 한 대 때렸는데 저만 벌을 선 거예요. '다른 애들 보기에 가만히 있어도 아빠 없는 게 표가 나나' 싶었죠. 그때부터 진짜 까불기 시작했죠. 표 안 내려고 말이죠. 그래서 고등학교까지 제 별명이 '까불이'였어요. 까불이." 까불이가 된 이후 더 이상 그를 놀리는 사람이 없었다.


"김미화는 모든 사람들을 좋아한다"
김미화는 여상을 졸업하고 관광회사 경리사원으로 취직을 했다. 무려 900대1의 경쟁률을 뚫고서 말이다. "마지막 면접에 딱 2명이 남은 거예요. 아주 예쁜 학생하고 저하고. 당연히 그 친구가 될 줄 알았죠. 그땐 제가 진짜 촌스러웠거든요. 엄마 원피스 빌려 입고, 머리에 파마까지 하고 말이죠. 그런데 제가 합격했다는 연락이 온 거예요. 이게 웬 떡이냐 해서 열심히 했죠. 사장님도 '미스 김은 진짜 재미있어'하고 좋아했고요. 기가 산 김에 물어봤어요. 왜 저를 뽑았느냐고. 그랬더니 이 분이 '솔직히 얘기해도 되냐'고 하시면서 그러더라고요. '경리는 돈을 만지는 직업이기 때문에 예쁘면 어떤 놈하고 눈이 맞아서 달아난다'고 말이죠. 이런 썅! 하하. 지금도 그 사장님 만나는데, 그때 얘기하면서 웃어요."

참 성격도 좋다. '못생겨서 뽑았다'는 사장을 지금도 만나 그때 이야기하면서 웃는다니. 부모가 원망스러워할 만도 한데, "우리를 돌보지 못한 엄마 입장이 백 번 이해가 갔다. 한 번도 원망한 적이 없다"고 한다. 기자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김미화씨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더니, 그는 오히려 "내가 모든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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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바닥을 치고 올라오지 못한 적이 없다"
김미화는 2010년 자신의 트위터에 '블랙리스트가 실제 존재하는지 밝혀달라'고 했다가 청춘을 다 바쳤던 KBS로부터 고소를 당해 경찰 조사를 받아야 했다. 지난해에는 8년간 해오던 MBC 라디오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에서 하차를 당했다. 그래도 그는 "방송도 좀 잘려봐야지 소중한 거 알겠더라"고 웃었다. "주변에서는 김미화가 얼마나 힘들까 하던데, 사실 저는 그렇게 늪에 빠지거나 바닥을 치고 올라오지 못한 적이 없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다'라고 말이죠. 방송 일이 행복하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사무치게 귀하다고까진 생각을 못했거든요. 그런데 (MBC 하차 후) 7개월 쉬면서 이걸 깨달은 거죠."

이런 긍정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게 고도의 연마술이 필요하거든요. 미움이 막 사무치면 긍정적이 돼요. 내가 왜 저 사람 때문에 괴로워해야 하나? 내가 좌절하고 있으면 나 미워하는 저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뭐 요런 거. 내가 괴로워한다고 저 사람도 같이 괴로워하지 않는다, 저 사람들은 내가 괴로운지도 모른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동료 연예인 가운데 가수 홍서범을 "되게 좋아한다"고 말했다. "홍서범씨는 제가 보기에, 주변에 어울려 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영양가가 없어요. 별로 득이 될 것 같지 않은 사람들. 그래서 제가 뭐라고 하면 홍서범씨는 항상 '저 사람 장점은 뭐다'라고 하는 거예요. '야, 그래도 옷은 잘 입어'하는 식이죠. 그래서 저도 배우죠. '상대의 장점을 찾아서 봐야겠구나'라고 말이죠."

'소셜테이너'로 불리는 김미화의 긍정은 '세상을 밝게 보면 다 해결된다'는 식의 긍정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이고, 사람에 대한 긍정이었지, 현상을 합리화하라는 긍정이 아니었다. "지금 우리사회를 보면 너무나 많은 비상식이 상식을 위협하고 있죠. 이런 비상식에 대해서는 젊은 친구들이 바꿔야 하는 겁니다. 특히 정치 말이죠."


"인생, 그거 순서대로 살면 얼마나 재미없나"
어떻게 보면 김미화의 인생은 순서가 거꾸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8년 만에 대학을 갔다. 그것도 대학에서는 사회복지를, 이어 석사학위는 광고홍보를 전공했다. 지금은 동양철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가고, 대학 졸업하고 취직하고, 그러다 시집가고, 이렇게 정해진 차례대로 산다면 인생이 얼마나 재미 없습니까? 젊은 친구들이 꼭 모든 것을 차례대로 살아야 하는지 의문을 가져봐야 합니다. 저도 학교 다닐 때 공부하기 진짜 싫었거든요. 그런데 하고 싶을 때 하니깐 정말 재미있는 거예요."

그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도움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사회복지를 전공했다"고 했고, "짧은 시간 안에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광고기술을 코미디에 활용할까 싶어 광고홍보를 전공했다"고 했다. 지금 동양철학을 공부하고 있는 것은 "나이가 더 들면 재미있는 할머니 진행자가 되고 싶은데 동양철학의 지식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서"라고 했다. "제 인생을 돌아보면 시종일관 하고 싶은 것을 따라온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인생이 점점 더 재미있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후배들한테도 얘기하고 싶은 거죠. 차례 따지지 마라고, 너희들도 한번 경험해보고, 부딪혀보라고 말이죠. 아까 말씀 드렸잖아요. 방송도 잘려봐야 소중한 거 안다고."


김미화의 묘비명은 '웃기고 자빠졌네'다. "집 아이들한테 제가 '엄마 묘비명이 뭐야'라고 하면 아이들이 '웃기고 자빠졌네'라고 해요. 좋잖아요. 전 사실 묘를 쓸 건 아니지만, 제 마음속 묘비명은 무대 위에서 사람들 웃기다가 무대 위에서 죽고 싶은 것, 자빠지고 싶은 겁니다. 제가 시사프로그램을 하고 있지만, 이건 다른 영역을 넘봐서 그런 게 아니라, 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거예요." 안데르센은 너무나 가난했기에 '성냥팔이 소녀'를 쓸 수 있었고, 못생겼다고 놀림 받았기에 '미운 오리새끼'를 썼다고 그 모든 불행에 감사했다. 김미화와의 만남은 그 두 편의 동화를 합친 것 같은 아름답고 큰 성장동화 한편을 읽은 느낌이었다. 김미화는 비록 세수도 안 하고, 키 높이 구두도 안 신었지만 아름답고, 컸다.

정리=최우영 기자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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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화.
최근엔 그녀를 나는 꼼사리다를 통해 만난다.
라디오를 잘 듣지 않는 나로서는 유일하게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잇는 통로다.
간간히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 듣던 MBC의 방송은 이미 없어진지 오래다.
일주일에 한 번. 한시간 반 남짓되는 시간을 위해 나는 기다린다.

김미화는 아름답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도 없을 것이다.
얼굴 예쁘면 뭐하냐. 어려운 사람을 위해 눈물 흘리고 울분 터트리고 함께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름다운 거다. 그런 사람들이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김미화를 좋아한다. 아름다우니까.

위 기사는 머니투데이 기사임을 밝힌다.
http://cnews.mt.co.kr/mtview.php?no=2012021115245506129
위 주소는 원문 기사 주소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