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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Doctor/history & myth

KINO(양철호)의 역사와 신화-문익점과 목화씨의 진실

by 양철호 2011. 11. 2.

고려말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문익점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목화를 보고 종자에게 따라고 지시했다. 종자는 목화를 재배하는 노파의 제지를 뿌리치고 목화를 몇 송이 따는데 성공한다. 이 목화는 원래 원나라 밖으로 못나가게 하는 반출 금지 품목이었는데 문익점은 목숨을 걸고 붓뚜껍 아래에 목화씨를 숨겨와 고려로 돌아온다. 그리고 재배에 성공해 의복 생활에 혁명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문익점은 오랫동안 목화를 처음으로 들여왔으며 밀수에 성공한 최초의 밀수꾼으로 불리기도 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 이야기는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일까? 과연 문익점이 진짜 목숨을 걸고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숨겨가지고 들어온 것일까? 무엇이 진실일까?

문익점은 고려 충혜왕 1년(1331)에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다. 그는 공민왕 9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김해부사록 등의 벼슬을 지내고, 사간원 좌정언으로 있던 1363년에 계품사 이공수의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가면서 목화씨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 어느 기록에도 문익점이 목화씨를 몰래 들여왔다는 기록은 없다.

[고려사]의 문익점 열전에 의하면 문익점이 원나라에게 사신으로 갔다가 목화씨를 얻어와 재배했지만 재배 방법을 몰라 대부분 죽고 몇 그루만 살아남았다고 적고 있다.
[조선태조실록]의 문익점 졸기에 더 자세하게 나오는데 역시 몰래 들여왔다는 기록은 없고 그저 재배되던 목화에서 씨를 십여개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돌아왔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그럼 도대체 왜 문익점이 목화씨를 몰래 들여왔다는 이야기가 퍼지게 된 것일까? 문익점에 대한 이야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목화와 관련된 이야기 뿐이다. 즉 목화 하면 문익점이다. 이 이야기는 최근에 나온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이미 형성된 이야기였다. 즉 세월이 지나면서 문익점에게 목화의 사나이라는 인식과 더불어 어떠한 신화적인 이야기가 덧붙여져 만들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추측할 뿐이다.

그 근거로 사실 원나라에서 목화는 반출금지품목이 아니었다. 목화는 원나라 사방에서 재배되는 흔한 품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문익점과 목화와의 관계를 그렇게 설정한 것은 그 당시의 정치상황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즉 공민왕과 원나라는 불편한 관계였다. 공민왕의 개혁 정책에 원나라는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즉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원나라의 긴장 관계 사이에 문익점이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이 자연히 문익점에 대한 신화를 완성시키는 장치로 작용했을 수 있다.

또 하나는 문익점과 정천익의 후손들이 만들어낸 신화적 이야기가 아닐까 추측되기도 한다. 문익점은 정천익과 공동으로 면화 사업을 벌여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는 분명 의복에 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성공이었다. 이런 공으로 인해 신화적인 인물로 이야기가 덧붙여져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사실 문익점은 정치적으로는 참 운이 없는 인물에 속했다. 덕흥군 사건(원에서 선택한 고려의 임금으로 원의 군사력을 등에 업고 임금이 되기를 원했지만 고려의 이성계 등에 의해 패했다)때 휘말려 덕흥군에게 벼슬을 얻었다는 이유로 파면되었다가 목화 보급으로 공로를 이정받아 우왕 때 복직 되었고, 후에 또 사전(私田)개혁에 반대하는 보수파에 붙었다가 조준의 탄핵으로 파면당해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이런 정치적으로 언제나 최악의 선택만 했던 문익점이 목화 보급이라는 공로 하나는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공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한 인물을 참으로 다양하게 포장하기도 하고, 다양하게 궁지로 내몰기도 한다. 한 인물이 신화적 인물이 되는 데에는 어찌되었던 그가 세운 공이 절대적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역사만이 줄 수 있는 재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