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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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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10. 10:57 Story Doctor/history & myth

잃어버린 왕국, 나주 반남고분의 주인은 누구인가

 

 

나주 영산강 유역의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반남면 일대에는 고분(古墳)들이 산재해 있다. 그 고분의 수는 약 30여기. 더군다나 그 규모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를 자랑한다. 일반인의 시각으로는 이 지역이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백제의 고분과 비교해 보기 쉽다. 그러나 백제의 고분에 비해서 상당히 거대한 이 반남 고분은 한국 고대사 최고의 수수께끼로 불리고 있다.



 

규모에 대한 예를 들어보자. 반남 고분 중 하나의 덕산리 3호 고분의 크기는 남북의 길이가 46미터이고 높이가 9미터에 달한다. 이 크기는 백제의 고분 보다는 엄청나게 커서 오히려 통일신라나 가야의 고분들과 비교가 될 정도다. 이 정도의 고분을 만들 정치세력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시기]에서 나주 반남 고분의 주인이 삼한시대 마한의 족장이 아닐까 추정한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사실 역사학계에서 바라보는 시각도 일반적으로 비슷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고 제대로 된 근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도대체 왜일까? 무슨 이유일까?

 

이 반남 고분의 매장법은 한반도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매장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의 봉토 내에 수 개 혹은 수십 개 이상의 시신을 담은 옹관이 합장되어 있는 것이며, 봉토 주위로 도랑이 존재했던 것도 특이하다. 옹관의 규모도 큰 것은 길이가 3미터에 무게가 0.5톤이나 나가는 것도 있다. 또한 금동으로 만든 호화로운 장식들도 존재했다.



 

이 고분에 처음 주목한 것은 일본이었다. 이유는 이 반남 고분이 일본의 고분들과 비슷한 모양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초로 조사한 기관은 조선총독부로 1917년에서 1918년 동안 대대적인 조사를 벌였다. 그러나 이들이 내 놓은 보고서는 이상하게 달랑 한 장짜리 보고서가 전부였다. 그리고 이 한 장짜리 보고서에 바로 임나일본부의 근간이 되는 왜인(倭人)의 매장 방식이나 유물과 유사하다는 내용이 포함된다. 그리고 추후에 자세한 보고서가 나오기로 되어 있었지만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이후 20여 년이 지난 후 1938년에 다시 발굴 조사에 들어간다. 그런데 실제로 제대로 된 조사는 이루어지지 못한다. 1차 조사 이후 보고를 통해 금동관이나 금동제 물품들이 발굴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도 제대로 된 조치를 하지 않아 대부분 도굴되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일본이 진정 반남 고분을 임나일본부의 근거로 사용하고자 했다면, 반남 고분의 매장 방식이나 유물이 일본의 것이라 주장하려 한다면 오히려 더 논리를 확대시키고 보호를 철저하게 했어야 했다. 그런데 일본은 너무나도 소홀하게 대해 심지어 도굴을 조장했다는 의심까지 사게 되었다. 이는 일본의 유물이 한국에서 발굴된 것이 아니라 반남 고분의 유물 주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지금의 일본을 세운 것이라는 결론에 부딪쳐 오히려 무시하고 도굴을 방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낳는다.

 

그럼 여기서 이야기 되는 왜는 과연 어디일까?

()나라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한전(韓傳) 보면 한과 왜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과 서는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은 왜와 접해있으며, 면적은 4000리가 된다.” 이 이후에도 여러 설명이 나오는데 동과 서의 바다를 경계로 둔다는 설명과는 달리 왜와 접해있다고 하는 남에 대해서는 바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즉 국경을 접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이를 통해 왜는 바다 건너 일본이 아니라 한반도에 있다는 설명이 된다. 그리고 비슷한 기록이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한조(韓條)에도 역시 등장한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백제본기 아신왕 6년에 왜와 국교를 맺고 태자 전지를 인질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모든 것이 왜를 일본에 있는 것으로 여기고 설명하면 이상했지만 한반도 내에 있는 정치세력으로 규정하면 설명이 쉬워진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한반도에는 과거 백제, 고구려, 신라, 가야 이외의 정치세력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기록은 여러 곳에 남아 있다. 그들이 3세기 경에 나주 반남 고분을 만든 장본인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고구려의 세력에 밀려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들은 일본에서 세력을 키워 실질적인 지배자가 된다. 이것이 바로 왜가 임나일본부를 주정하는 근거가 되나 사실 역설적으로 보면 오히려 왜가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 한본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된다는 점이다.

 

아직은 여러 가지 역사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들이 많다. 조작된 광개토대왕릉 비문도 그러하며, 심심치 않게 역사왜곡에 열중하는 일본의 문제도 풀어야 한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한반도에 존재했던 왜의 기록을 무시할 수는 없다. , 한반도에 존재했던 왜는 일본에서 건너온 세력이 아닌 일본을 세운 세력이라는 점을 우리는 추측해볼 수 있다. 바로 일본 문명의 기원이 바로 한반도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바로 나주 반남 고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posted by 양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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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본에 갑자기 어떤 세력이 나타나서 일본의 세계관이 급변하죠.
    이 세력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세력이라는 주장이 꽤 있습니다.

    다만, 여러 기록을 살펴봤을 때, 임나일본부는 말도 안 되지만,
    일단 일본이 가야쪽에 일종의 거점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이 역시 부정할 수 없는 현재까지의 분석이지요. 앞으로 뒤엎어질 가능성도 있지만.

    광개토태왕비의 문구는 그저 백제를 까내리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본래 국가와 국가의 관계라는 게 항상 우위를 점할 수는 없는 거지요.
    백제는 고구려에게 박살이 난 뒤, 국가적 위상도 떨어지고, 어떻게든 다른
    나라의 군사까지 끌어들여, 고구려와 전쟁을 준비해야했기 때문에
    일본에게 외교적 우위를 빼앗깁니다만...

    광개토태왕 시기에는 오히려 백제가 일본보다 훨씬 외교적으로 우위에
    있었습니다. 칠지도가 그걸 명확하게 증명하고 있죠.

    광개토태왕비를 보면 백제를 '백잔'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악의가 보이는데,
    결국 백제를 까내리기 위한 문구라고 보면 될 것같습니다.

    • 양철호 2011.10.10 12:38 신고  Addr Edit/Del

      오옷.. 역사에도 해박하시군요. ^^ 그렴 역사에 대한 여러 수수께끼도 종종 올려야겠네요.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